티나의 오늘하루

20210421 청심환

inherpeace 2023. 8. 17. 10:56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70대 노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거구의 2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피해자는 여러 곳에 골절상을 입을 정도로 부상 정도가 심한데요. 경찰은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 여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OOO 기자의 단독보도입니다.

<리포트>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
어제(22일) 오후 3시쯤, 70대 남성이 젊은 남성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가해자는 아파트 거주자인 20대 남성 A씨였습니다.
A씨가 할아버지뻘인 B씨를 폭행한 이유는 눈이 마주쳤다는 게 전부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B씨는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주민들은 가해자가 다시 돌아와 언제 또 비슷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

TV속 장면을 보기 힘들어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리모컨 위 빨간 버튼을 누른다.

“B씨는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건사고에서 자주 듣던 리포트 속 문장이 귓가를 맴돈다. 익숙한 듯 흘려보내던 리포트가 오늘따라 다르게 들린다.

“골절상을 입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하다”는 의사의 소견이나 진단보다, 피해자가 가장 힘들어 하는 게 무엇인지를 짚어낸 보도라 더욱 그랬다. 검색창에 ‘노인 폭행 구속’ 키워드를 넣어봤지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장을 쓴 건 이 기자 외에 찾지 못했다.

누군가가 다치고 내상을 입은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들인 노고를 잘 안다. 해가 뜨기 전부터 나와바리 경찰서 서너 과 파출소 지구대를 부지런히 돌았을 어느 기자가, 퀭한 눈으로 주취폭력 가해자와 마주하며 인상을 쓰고 키보드를 붙잡고 있거나 혹은 모처럼 조용한 서의 평온을 누리다 그걸 깨고 들어온 기자를 노려보며 비협조적으로 일관했을 형사에게서 사건 단독 하나를 캐낸 그이가, 적당히 육하원칙만 끄집어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걸 가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

“B씨는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러 문장 속에 묻힌 이 한 문장에서, 기자는 기계적으로 “신체의 어느 부위가 전치 몇 주의 진단을 받을 만큼 다쳤다”고 쓰지 않고, 한 번쯤 피해자와 마주했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피해자를 마주하는 일은, 대개 이성이 마비되고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뒤섞여 살짝 나사가 풀려보이는 상태의 사람과 대화를 주고 받는 걸 내포한다.

7년여 전 잠시나마 사건팀에서 세 시간씩 자며 반수면 상태로 일할 때 공감을 하는 일에도 꽤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실감했다. 내 스스로의 마음을 간수하는 법을 터득하기 전부터 늘상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자랐기에 습관처럼 내 마음보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는 일이 익숙해져버렸다. 미국 속담으로 그의 신발을 신어봤다(in his shoes)고 할까. 상대에게 귀를 열고 내 모든 신경을 같은 상황에 밀어넣어 보는 것. 그렇게 익숙한 일이, 잠이 부족하고 내 스스로를 챙기지 못할 때에는 몰입부터 삐걱거렸고 어찌저찌 들어주고 난 뒤에는 소진되어 있었다.


***

난생 처음 마셔본 청심환은 냄새부터 힘들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저절로 감긴 눈꺼풀을 더 꽉 눌러 닫으며 참은 숨을 마시지 않도록 길게 뱉어야 했다. 대체 뭘 갈아넣었기에 이렇게 고약한가 했더니 소의 담낭에 있는 결석을 포함한 여러 한약재란다.

결석에 안정제라도 들었는지, 날뛰던 심박은 차츰 가라앉았다. 손등에 난 상처도, 터졌던 실핏줄도 사흘이 지나니 조금씩 회복됐다. 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분노, 답답함, 억울함, 후회, 자책, 궁금증은 실타래처럼 엉켜 끝없이 속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답을 알고 싶은 게 아닌데도, 자꾸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당일엔 중요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침착하려고 애쓴 덕분인지 긁힌 상처 외에는 멀쩡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엔 몸을 일으키지 못했고 저항하느라 놀란 근육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물리치료는 그닥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여기저기 떠벌리며 징징대는 게 직효약이었다. 말을 할수록, 누군가의 걱정에너지가 내게 와닿을수록 내상이 아물어갔다.

주변의 반응은 매우 다채로웠다.

젊은 여성 두 명이 연거푸 피해를 당하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도와달라” “112에 신고해달라”는 말을 외면했다는 말을 듣고 “그럴 땐 검정색 옷 입은 분, 하고 지목해야 해.”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동생. “괜찮냐” “많이 안 다쳤냐”는 말보다 육하원칙을 물으며 “야 그거 기사 안 나왔지? 사건팀에 단독 주자”는 전직 캡. 그런 일을 겪고도 곧바로 미팅에 참석해 끝날 때까지 내색하지 않고 기획면까지 마감한 걸 뒤늦게 알고 말 없이 딸기요거트와 허브티를 사다주신 부장. “피해자가 둘다 여성이지? 그런 녀석들은 여성만 공격한다니까!” 하며 호신용 스프레이를 챙기라고 조언해주는 동료.

이 모든 말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아, 기사쓰자며 나를 취재한 전직 캡의 말은 빼고.

가장 큰 위로는 내가 느낀 감정 중 어느 하나라도 헤아려주며 잠시나마 온전히 내 심정이 되어준 이들의 말이다. 신경안정제보다 나를 더 안정시켜주었고, 물리치료가 못 달래준 뻐근함을 풀어주는 마법이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오전이랬지? 범죄심리상 그런 녀석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또 나타나게 돼있어. 오빠가 내일 출동한다. 내가 가서 똑같이 혼내줄게. 딱 말해. 손등이랑, 또 어디. 왼쪽 눈? 알았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인상착의가 어땠다고? 니가 내 친구 때린 놈이야? 너 운동선수한테 안 맞아봤지.”

내가 느꼈을 분노, 반격조차 하지 못한 후회와 아쉬움을 짐작하고 그걸 표출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려는 말이었다. 진짜 내 친구가 거기에 가서 심신미약 상태일지 모르는 가해자를 때려줄 리는 없다. 처자식 있는 녀석이 그렇게 철없게 행동했다가는 또 한달 용돈이 끊길 염려가 있다. 그런데도 효력없는 그 말에, 표출되지 못하고 초고속냉동 상태가 되어버린 가슴의 돌덩이 같은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공감의 힘은 꽤 크다.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뒷짐지고 구경하던 그곳 주민들은 보도블럭에 흩어진 내 짐을 주워주며 “여기 자주 출몰하는 미친 사람이야. 일진이 안좋다 생각하고 얼른 가던 길 가. 뭣하러 신고까지 해”라며 위로는커녕 도와달라는 말을 외면한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뻔뻔스러운 말을 구태여 덧붙였다. 하지만 무차별폭행을 가한 여자는 전과도 없고 최근 병원기록도 없으며, 무엇보다 차림새가 너무 멀쩡했다. 먼저 내린 다른 피해자에 이어, 다음 버스에서 내리던 나를 향해 무작정 달려든 그는 세상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출동한 경찰에게는 “저 여자 둘이 나를 먼저 때리고 도망갔다”며 일면식도 없는 다른 피해자와 내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극배우가 대사를 읊듯 자연스러워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경찰에게 들으니 그는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집에 와있었는데 약을 안 먹은 지 오래 됐다고 했다.

“자기들도 똑같이 당해봐야 돼 수수방관한 그런 사람들은! 먼저 당한 피해자가 도망쳐서 신고했으니 망정이지, 도와달라는데 자기만 안 다쳤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정말 치가 떨린다. 그런 사람들 잊어버려. 마음 따뜻한 사람도 많은데 하필!”

난데없이 당한 폭행보다 더 충격적인 건 주변에 아무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다는 것.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던 상황이라는 걸 아는 죽마고우는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심정을 짚어주었다. 트루먼쇼라도 되는 건가, 나는 정해진 각본에 따라 희생될 제물인가 하는 생각이, 두 번째 주먹이 날아오는 찰나 머리를 스쳤다.

충격을 조금씩 지워준 건 소식을 듣자마자 복도로 나와 전화를 걸러온 진심이 담긴 목소리, 그리 친하지 않은 선배가 어설프게 어깨와 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토닥임, 가해자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목소리 높여 열내는 빨간 얼굴... 아, 충격은 먹는 걸로 잊어야 한다며 먹킷리스트를 함께 이루기로 한 약속도.

“B씨는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아마도 덮어쓰기할 새로운 기억이 여러겹 덧씌워져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일상은 소중하고 망각은 감사하다.

카카오가 오늘도 내 안녕을 물었는데, 다행인지 주관적 행복감은 오늘도 90을 넘었다. 심리적 외상일 뿐 내면 깊은 곳을 다치진 않은 모양이다.

홈그라운드의 위로로 빚은 청심환은 효과가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또다시 속이 시끄럽다. 그러게 태권도 1단이 무슨 소용이며 호신용 호루라기는 꺼내기도 전에 가방을 뺏기는데 가방 무게만 더할 뿐,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 먹킷리스트는 2지구에 핫하다는 닭갈비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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